▶문화노트 :: 한국체육사의 위대한 인물 - 손기정
한국 체육계의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손기정선생님. (이하 존칭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손기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아마, '손기정'이라는 이름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점기시절, 일장기를 월계수로 가린 인물'로 기억하고 있을 것 입니다. 맞습니다. 손기정은 1936는 베를린올림픽에서 시상식내내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월계수잎으로 가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손기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적마라토너의 탄생
손기정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네이버지식백과에 따르면, 어린시절 가난한 가정환경때문에 손기정은 16세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출근을 하기위해 매일 20여리의 길을 달려서 출퇴근 했다고 합니다. 20리를 미터로 환산하면 8km가 조금 못되는 거리이지만, 그시절 다듬어지지않은 돌길을 매일같이 뛰어다녔다고 생각해보면 분명 쉽지않은일이었을 것입니다.
손기정은 1932년 동아일보 마라톤에서 2위를 하게됩니다. 그리고 1933년부터 36년까지 13번에 걸쳐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그 중 10번 우승했을 정도로 국내에서는 손기정을 따라올 선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손기정은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세계무대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실력덕분에 강점기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대표선수로 발탁되어 1936년 열리는 베를릴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일장기말소사건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릴만큼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관심을 받는 종목입니다. 이런 종목에서 손기정은 보란듯이 올림픽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전 세계 체육인이 승부를 겨루는 올림픽에서 42.195km라는 힘든 경기를 우승으로 마쳤다면, 기분이 어땠을까요? 아마 정말 말로표현할 수 없을만큼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시상식에서 손기정선수는 웃지않았습니다. 그는 시상식내내 고개를 떨궜으며, 월계수로 자신의 가슴팍에 있는 일장기를 가렸습니다.
이러한 손기정의 행동이 예상밖이긴 했지만, 처음에는 그의 의도에대해서는 누구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손기정선수만의 일이아니었습니다. 당시 손기정과 같이 출전했던 남승룡선수(3위)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떨구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노력해서 얻은 결과긴 하지만, 이것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름으로 받는 메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우리나라선수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언론에서 크게 보도를 합니다. 그만큼 대단한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지배를 받고있던 당시에도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조선중앙일보에서 보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자들이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고의적으로 삭제후 내보냈고, 총독부에서는 인쇄오류라고 여겨 발행을 허가했습니다. 이후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자 조선일보는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지라는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건은 '언론'이라는 주제 뿐만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회자되고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도록 한 사람이 바로 손기정선수라는 사실입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뿐만아니라,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있는 모습이 강점기 피폐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베를린올림픽, 그후
베를린올림픽에서 올림픽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손기정선수. 그 대단한 기량을 꾸준히 발휘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기록에따르면 베를린올림픽 이후 여건상 제대로된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기정은 선수로서가 아닌, 우리나라 육상계의 미래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게됩니다.
1946년, 손기정은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합니다. 광복 후 여러모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손기정은 마라톤보급회를 창설하여 제대로 된 마라톤인재를 육성하기위한 노력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노력이 이어진 덕분에 1947년 보스턴 국제마라톤에 손기정은 선수가아닌 감독의 역할로써 출전하게 되었고, 이 대회에서 서윤복선수가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크고작은 성과가 마라톤계에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1954년에 열린 보스턴국제마라톤 대회가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회에 손기정은 우리나라 선수들을 이끌고 참가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 대회 1,2,3위 모두 국내선수가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함기용(1위), 송길윤(2위), 최윤철(3위) ) 이를 계기로 손기정은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뿐만아니라, 마라톤계 최고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국제적으로 존경을 받게 됩니다.
국내에서도 대한민국 체육상(1957년)을 시작으로 국민훈장 모란장(1970년)과 체육훈장 청룡장(2002년)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92년, 손기정의 한마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손기정이 했던 말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해보려고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선수모습]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선수모습]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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