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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우리나라의 스포츠 정책과 발달과정

비주얼라이즈 2015. 6. 4. 14:07




▶교육 :: 우리나라의 스포츠 정책과 발달과정


이글에서는 최초의 근대식 운동회인'화류회'부터 우리나라가 지금의 '스포츠강국'이 되기까지의 시기별 체육정책과 그에대한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운동회'개념의 등장


운동회의 사전적 개념을 살펴보면, "여러사람이모여 여러가지 운동경기를 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있다. 국가기록원에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근대적의미의 운동회는 1896년 5월2일에 열린 영어학교의 '화류회'라고 소개하고있다. 이후 1897년에 '영어학교 대운동회', 1898년 '외국어학교연합운동회'가 열렸는데, 당시 운동회의 종목이 100/200/400 경주, 멀리뛰기/높이뛰기/씨름등으로 종목별 구분이 이루어져있다는 점, 그리고 민속경기인 '씨름'도 종목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띈다.








앞서 살펴본 운동회의 종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당시의 경기는 놀이(play)의 개념을 넘어선다. 국가기록원 역시 이에대하여 "개인적인 즐거움 보다는 단체경기를 통한 협동과 단결 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하고있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일제 침탈에 대한 민족의 울분과 교육구국 의지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목적이 분명했기때문에,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학교연합운동회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광복 후 나라를 재건하는 상황속에서도 1945년 10월에 '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는데, 이는 지금의 전국체육대회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육상과 축구를 포함하여 10개 종목에 많은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이듬해 열린 1946년 '조선올림픽대회'라는 명칭으로 열린 대회에는 약 5천명에 이르는 선수가 참가하였고, 1948년부터 '전국체육대회'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국가단위 뿐만아니라, 지역 및 단체에서도 다양하게 열리게된다.






[캡쳐사진] "남조선축구전 십칠일부터 개최", 동아일보 1947.5.8


위 기사의 한글변환된 내용을 살펴보면, "영광지국 영광군체육회에서도 씩씩한 스포츠정신을 고양하고 경기의 묘를 연마하기 위하여 (‥)"에서 대회개최목적을 살펴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후



한국전쟁 이후, 운동회는 지역, 단체별로 단결심과 공통체정신을 배양하기위한 행사로 열리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배경속에서 학도체육대회, 소년체육대회(소년체전), 전국대육대회(전국체전)등의 대규모 행사가 개최되었다.





"체력은 국력"의 시대


1962년에는 "국민체육진흥법"이 제정되어, 체육의날과 체육주간등이 지정되었고, 한번 쯤 들어봤을 법한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아래 연합체육대회가 활성화되었다.




스포츠 정책이 본격화 된 것은 박정희 정권시기.



1961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었을 당시부터  중고생체육대회를 여는 등 체육정책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고있었다. 이는 대통령 재임기간내내 확고하게 이어졌다.




대통령배 축구대회에 참석하여 시축을하고, 72년에는 전국체전과 별개로 전국소년체전을 개최하고 그 개회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관심과 그에따르는 정책에 힘입어 전국에서 다양한 종목의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이와함께 학교의 운동부활동이 활성화 되게 된다.


90년대에는 IMF라는 국가경제적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국체전 시설 건립, 운동장, 체육관 건립추진이 이루어졌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스포츠



2002년 월드컵 4강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2012 런던올림픽에서 종합성적 5위를 기록했으며, 피겨의 김연아, 수영에는 박태환, 그리고 리듬체조에는 손연재등 다양한 종목에서 지난 어느시기보다 화려한 스포츠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